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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생활이야기] 일의 기대 및 실제 속도에 대한 감각

by 시민교육 2021. 11. 16.

1. 두 가지 종류의 일 : 루틴성 일과 비루틴성 일

 

일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상대적으로 단순한 육체와 정신의 동작을 요하며 시스템이나 관리자에 의하여 그 동작을 수행할 수밖에 없는 단기적인 작업 수행 단위가 정해져 있는 종류의 일이다. 물론 여기서 단순하다는 것은 말 그대로 단적으로 단순한다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받아 일단 그 일에 익숙하게 되면 추가로 창의적으로 해법을 짜내거나 계획을 스스로 구성해서 일정을 정리할 필요가 없다는 상대적인 의미이다. 이것을 정규적인 틀로 관행화된 노동, 루틴 노동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다른 하나는 그 계획과 실행에 상대적으로 복잡한 육체와 정신의 작동을 요하며 시스템이나 관리자에 의하여 그 동작의 충분한 패턴화와 실행 점검이 단기 단위로 강제되는 것이 아니어서, 일의 수행 방식 형성과 속도에 대한 자기 자신의 제어가 매우 절실한 일이다. 이것을 정규적인 틀로 관행화되지 아니한 노동, 비루틴 노동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복사물이나 출력물을 스테이플러로 찍는 작업은 첫 번째 유형인 루틴 노동에 속하는 일이다. 그러나 20페이지 짜리 글을 쓰는 일은 두 번째 유형인 비루틴 노동에 속하는 일이다.

 

물론 두 번째 유형에 속하는 일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 이미 나와 있는 정보를 취합하여 이미 정해진 틀에 맞춰 보고서를 쓰는 일은 상대적으로 비루틴성이 약하다. 예를 들어 변호사에게 단지 법원이 어떤 판단을 내릴 것인가의 예측에 기반하여 어떤 행위의 합법성/위법성 여부에 관한 의견서를 쓰는 일은 두 번째 유형에 속하기는 하지만 상대적으로 비루틴성이 약한 편이다. 반면에 어떤 종류의 사업을 새로 시작하려고 하는데 그 종류의 사업을 하면서 불법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조치들 전반에 대한 의견서를 쓰는 일은 비루틴성이 상당히 강하다. 또한 치열하게 증거와 법리를 다루는 복잡한 사건을 수행하거나, 기존 판례를 뒤엎을 새로운 법리를 논증하는 일도 비루틴성이 강하다.

 

그런데 비루틴성 전부가 과업 자체에 객관적으로 결부되어 있는 속성은 아니다. 예를 들어 특정한 유형의 사건을 처음 맡은 개업 변호사에게는 그 사건의 수행은 비루틴 작업의 속성이 매우 강할 것이다. 그러나 같은 유형의 사건 수행을 많이 해본 변호사나, 이미 선배 변호사들이 같은 유형의 사건 수행을 많이 한 기록이 데이터베이스로 축적되어 있는 회사에 속한 변호사는 이미 틀이 잡힌 체계에 따라 사건을 수행하면 되므로 비루틴 작업의 속성은 약화된다. 그러므로 따라서 비루틴성의 일부분은 수행자 중립적(perforemr-neutral)이지만[즉, 작업자가 누구이든 상관없이 그 과업 자체가 비루틴성을 가질 수밖에 없어서 비루틴적인 수행을 하게 되지만], 비루틴성의 상당부분은 수행자 상대적(performer-relative) 또는 수행자 관련적이다. 이 맥락에서, 동일한 변호사라도, 특정 유형의 사건을 전혀 해보지 않은 t1시점의 그 사람과 그 유형의 사건을 많이 해본 t2시점의 그 사람은 상이한 수행자이다.

 

또한 비루틴성의 또 다른 상당부분은 다른 과업이 얼마나 많은가에 의해 결정된다. 즉 다른 과업 상대적인(other task-relative) 성격, 과업 자체의 순전한 수에 의한 창발적 성격을 갖는다. 하나로 떼어서 보자면, 즉 그것만 정해진 특정 마감에 하면 되는 경우에는 그 성격이 루틴 과업에 속하는 것들도 아주 수가 많아지게 되고 마감이 각각 달라지게 되면, 이 과업들 전체를 수행하는 데는 스스로의 일정 조율, 그리고 실행의 노력을 요하게 되므로 비루틴적인 성격이 창발된다.  

 

보통 사람들의 삶은 개개의 과업 그 자체만 떼어 보아 행위자 상대적인 일차적 비루틴성 과업과 루틴성 과업을 여러가지 함께 수행해야 하는 입장에 있어 이차적인 비루틴적 성격이 창발되는 과정을 살아내고 있는 것으로 묘사할 수 있을 것이다.

 

2. 비루틴성 일과, 지속가능한 속도 가늠 및 실행의 중요성

 

삶에는 결국 크게 보아 창발된 비루틴성 안에 또 과업 자체의 비루틴성이 들어 있기 때문에, 삶을 산다는 것이 요령 없이는 만만찮은 일이 된다.

 

물론 삶 중에서 수동적이며 피동적인 부분은 전혀 어려움이 없다. 누구나 소파에 기대어 자신이 좋아하는 웹툰을 스윽스윽 볼 수 있고, 미국 드라마를 몰아서 볼 수도 있다. 여기에는 무슨 요령이 필요없다. 그저 자극이 자신을 이끄는 대로 몸과 정신을 맡기면 된다. 그러나 수동적이며 피동적인 부분은 인간 삶에서 휴식에 해당하는 부분에 불과하다. 휴식은 인생에서 상당히 중요한 부분이지만 휴식만으로 살아갈 수는 없다. 여가를 보낸 시간 중 가장 재미있고 기억에 남는 시간이 휴식 형태의 여가 보내기도 아니다. 로버트 노직이 수행한 사고실험인 '경험기계'에 들어가는 것과 가장 유사한 경험이 바로 휴식의 경험이다. 휴식을 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의 성품(character)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 거의 없다. 왜냐하면 성품은 발휘되는 것이며, 발휘를 위해서는 능동적인 참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삶 중에서 능동적인 부분에서도 루틴성의 부분은 크게 난해함은 없다. 정해진 매뉴얼에 따라, 주위의 지시 여건이 이끄는 대로 동작을 수행하면 결국 예정된 시간에 완료되기 때문이다. 루틴성 일이라고 해서 육체적, 정신적 괴로움이 없는 것은 당연히 아니며 오히려 고유한 괴로움이 있을 수는 있지만, 난해함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이차적으로 창발된 비루틴성이건, 자신에게 상대적으로 정해지는 과제 자체의 일차적인 비루틴성은 어려움을 만들어낸다. 이 어려움 중 하나가 일 수행의 지속가능한 적절한 속도를 가늠하는 일이다.

 

가늠해야 할 대상은 두 가지 요소가 이미 상호작용한 복합체이다. '지속가능한 수행'과 '적절한 속도'는 따로따로 결정되어 합해지는 것이 아니라, 둘이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동시 결정된다. 이는 비루틴성 과제에만 한정되어 성립하는 원리도 아니다. 루틴성 일, 이를테면 스테이플러로 복사물들을 한 부씩 철하는 일조차도 지나치게 빨리 하려고 하면 삐뚤삐뚤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되고 또 힘이 들어서 몇 분 하고 나면 녹초가 된다. 다만 비루틴성 과제에는 적절한 속도로 하는 일이 지속가능한 수행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 아주 분명히 보이기 때문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기만 해도 눈치채지 못하는 난점이 없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지속가능한 적절한 속도의 가늠은 한 번에 끝나는 과업이 아니다. 그 이유는 지속가능한 적절한 속도가 과업마다 다를 뿐더러, 하나의 복합과업의 각 부분 단계에서도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시행착오를 통해 재가늠해 나가야 한다.

 

3. 적절한 지속가능한 속도의 의미

 

과업 수행의 적절하고 지속가능한 속도(proper and sustainable speed of task performance)라는 것은 (i) 과업 수행의 적정 수준의 질(decent quality)이 실현되도록 하면서 (ii) 지나치게 끌어올린 속도 때문에 하루의 과업 수행을 마칠 때까지 급 피로해져서 과업 수행을 할 육체적 기력이나 정신적 기력이 이른 고갈을 맞이하지 않는 (iii) 일의 리듬감을 느낄 수 있는 속도이다.

 

(i)은 객관적 기준으로 판단되는 요소이다. 만일 복사물을 스테이플러로 묶는 일을 하면서 지나치게 빨리 한다면 (i)이 형편없을 것이다. 삐뚤삐뚤 스테이플러가 막 튀어나오게 찍히게 될 것이고 복사물이 가지런히 묶이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사물을 정확하게 겹쳐서 스테이플러를 찍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찍어야 할 복사물이 많은데 장인 수준의 질을 목표로 할 필요는 없다.  (ii)와 (iii)은 주관적 기준으로 판단되는 요소이다. 복사물을 적정 속도로 스테이플러로 묶을 때에는 기진맥진하지도 않고 적당한 리듬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억지로 빠르게 하려고 하다보면 그렇게 빨리 해서 아낀 시간은 그렇게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적정한 수준으로 일을 다 마쳤을 때에 비해 훨씬 더 기진맥진하게 된다.

 

그런데 일의 적정속도는 상한만 있는 것은 아니고 하한도 있다. 일을 지나치게 느리게 하다 보면 일의 흐름이 잘 연결되지 않아서 오히려 (iii)의 요소인 리듬감을 잃게 된다. 예를 들어 책이나 논문 기타 자료들을 지나치게 천천히 읽으면 오히려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긴다. 왜냐하면 보통 그런 것을 읽고 검토할 때는 전체 맥락을 구조화해서 정리하는 일이 필요한데, 지나치게 느리게 일을 진행하다 보면 그러한 정리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ii)의 경우에도 문제가 생긴다. 일을 느리게 한 것 자체 때문에 기진맥진해지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게 아니라, 일을 지나치게 느리게 해서 (iii) 리듬감이 사라지게 되면, 뇌가 놀고 있게 되어 다른 생각들이 불쑥불쑥 들어오게 된다. 그래서 수행하고자 하는 과제와 무관한 외부의 자극이나 내적 충동에 아주 취약한 상태가 된다. 일이 훨씬 지루하게 느껴지므로 조금이라도 곁길로 새도록 유도하는 외적 단서(external clue)나 내적 단서(internal clue)가 생겨도 그냥 바로 굴복하게 된다. 특히 일의 진행이 지나치게 느리게 되면 심리적으로 만족을 느끼는 최소 단위의 일의 완수의 감각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이 감각은 상당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최소단위들의 완수의 감각은 계속 흐름을 이어서 다음 일을 하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일의 적정 속도를 스스로 파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실제로 과거를 돌이켜보면 일이 적당한 속도로 잘 되었던 때가 있고, 지나치게 빨리 해서 기진맥진하고 창조적 요소가 억압된 때도 있고, 지나치게 느리게 해서 중간에 곁길로 새서 다시 시간에 쫓기던 때도 있으며, 또 그렇게 시간에 쫓기니 오히려 곁길로 새고자 하는 내적 단서에 더 취약한 상태가 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일을 어떻게 하면 적정 속도로 수행할 수 있을까?

 

4. 과업 속도의 기대와 과업을 보는 시각의 전환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돌아보면, 한 가지 두드러진 사실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과업을 지나치게 빠르게 하겠다는 의도 및 할 것이라는 기대와 과업의 진척이 지나치게 느려지는 사태가 아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사태는 대충 다음과 같이 진행된다. 과업을 빨리 처리하려고 한다. 과업 수행의 적절한 구조와 순서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채 과업을 하나의 덩어리를 보고 그것 전체를 처리해서 치우는 식의 상이 박혀 있다. 그러나 과업의 적절한 구조와 순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빨리 진척되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초조해지고, 그 과업의 성질 자체가 본래적으로 불쾌하다는 잘못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그 일에 손을 대지 않게 된다. 또는 손을 대었다가도 다시 떼고 곁길로 샌다. 그래서 다시 그 일의 흐름을 개시하는 데 정보처리의 부담이 늘어난다. 이 또한 과업의 성질 자체가 본래적으로 불쾌하다는 인상을 강화한다. 그러다보니 과업 수행의 구조와 순서를 파악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막바지에 몰려서야 과업을 몰아서 하게 되는데 그때 가서야 구조와 순서를 파악하게 된다. 물론 시간이 모자라므로 과업 수행의 질은 꾸준히 했을 때에 비해 떨어지며, 그 동안의 마음 고생으로 인해 그 과업을 다 완료하기까지의 삶이 빨리 지나갔으면 하는 시간으로 전적으로 수단화된다. 그러나 곧 다음 과업이 도래하게 되며, 그리하여 수단화된 삶이 다시 이어진다.

 

그러므로 과업 속도를 함부로 작정하고 기대해서는 안 되며, 특히 과업 전체를 하나의 고정된 덩어리로 보고 거기에다가 외부에서 주어진 마감에 맞춰 처리 속도를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과업은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수많은 부분사항들로 이루어진 복합체로 보는 것이 낫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러하다. 왜냐하면 애초에 과업의 적절한 속도가 문제되는 과업은 복합과업이니까 말이다. 복합과업은 구조와 순서, 그리고 각 부분의 수행의 양과 질에 대한 자기 조절이 가능하다. 따라서 과업 수행은 객관적으로 요구되는 절대적인 수준이 있는 외부에서 부과된 요구가 아니라, 스스로 구조와 순서를 파악하여 무엇을 강조하고 무엇을 덜 강조할지를 결정할 수 있는 주도적인 사업이다.

 

5. 접근 전략

 

(1) 익숙해지기와 과업조절 파라미터 파악

일단 과업을 곧바로 착수해서 팍팍 진척시키겠다는 기대를 버린다. 그 대신 과업의 구조와 순서, 그리고 구성부분별 수행의 질이나 양(이를 '과업조절 파라미터'라고 할 수 있다)을 파악하기 위해 과업에 익숙해지는 기간이 필요함을 안다. 이 익숙해지는 기간에는 과업의 자료들을 보면서 의식적으로 과업조절 파라미터를 파악한다. 공책에 구조도를 그려보고, 여러가지 중에서 강조할 부분과 간단하게 처리해도 되는 부분을 골라내고, 보다 효과적인 일의 순서와 속도를 가늠한다.

  

(2) 가늠된 구조에 따른 시행착오 - 파라미터의 재구성 및 세부전략의 수립

일단 가늠된 구조에 따라 일을 수행해보면, 처음 가늠한 대로 그대로 되지 않음을 보통 발견한다. 그러면 다시 과업조절 파라미터를 재구성한다. 이때 만일 일의 속도가 과업을 끝내기 적정치 않다 싶으면, 이를 파라미터에 재반영한다.

또한 일을 실제로 해보면 효과적인 전략과 효과적이지 않은 전략이 가려지는 경우가 있다. 또 이전에는 생각하지 못했지만, 새로운 전략이 생각날 수 있다. 그러면 그 전략을 명시적으로 기재해놓고 그 전략을 따라 해본다.

 

여기서 주된 지침은 "일의 본질적 부분은 하면서 일을 얼마나 쉽고 간단하게 수행할 것인가"이다.

 

즉 이 단계에서는 장인정신은 금물이다. 이 단계에서부터 지레 완벽한 일을 해내겠다고 자세를 잡는 장인정신을 "처음부터 덤비는 장인정신"이라고 칭할 수 있겠다. 처음부터 덤비는 장인정신은 과업을 자신이 주도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객관적인 요구의 덩어리로 보는 사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복합과업은 앞서 말했듯이 객관적 요구의 덩어리가 아니다. 거기에는 자신이 조절할 수 있는 여러 파라미터들이 있다. 그런데 처음부터 덤비는 장인정신은 이 객관적 요구의 덩어리에 부합하는 객관적인 일의 방법이 미리 고정되어 있다는 전제에서 일에 착수하여 그대로 일을 끝내며 중간의 시행착오와 파라미터 조절을 허용하지 않는 정신이다. 그러다보니 주도적인 전략의 재수립과 강조점의 선별이 잘 떠오르지 않게 된다.

 

(3) 과업 자료의 물리적 순서와 인접성보다는 과업 종류의 논리적 순서와 심리적 인접성을 중심으로 일 조직하기

 

과업 자료의 물리적 순서와 인접성이란, 과업의 자료가 물리적으로 어떻게 편제, 편철되어 있고 어떤 자료가 어떤 자료 바로 곁에 놓여 있는 모양을 뜻한다. 예를 들어 논문을 작성한다면 과업 자료의 물리적 순서에서는, 바로 다음에 써야 할 문장에서 필요한 자료 인용이, 다음 절의 핵심 내용을 쓰는 것보다 인접해 있다. 

반면에 과업 종류의 논리적 순서와 심리적 인접성이란, 과업을 가장 쉽고 효과적으로 하려면 어떤 순서로 해야 하는가와 작업 공간에 여러가지 것을 번갈아 올리고 내리고 하는 식의 번잡함을 겪지 않으려면 지금 하는 과업 다음의 과업으로 인접한 것이 어떤 것인지 파악된 모양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논문을 작성한다면 때때로 다음에 써야 할 문장에서 필요한 자료 인용보다는, 그 자료 인용이 필요하다는 점을 ** 등의 표시로 간략히 해놓고 다음 절의 핵심 내용을 쓰는 일로 바로 넘어가는 것이 심리적으로 인접한 경우가 흔하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출판사에서 온 번역서 1교 원고(번역 초고를 출판사 편집자가 한 번 퇴고한 것)가 와서 이 원고를 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해보자. 물리적 순서와 인접성을 기준으로 한다면, 한 페이지씩 다 한꺼번에 검토하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면 엄청나게 힘들다. 

실제로 번역서 1교 원고를 다시 검토하는 작업은 네 가지 작업의 복합체다. (i) 편집자의 수정이 적합한지 여부를 살피기 (ii) 이전에 번역자와 편집자가 발견하지 못했던 오역이나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있는지 살피기 (iii) 곧바로 생각해서 고칠 수 있는 부분 고치기 (iv) 생각을 진득하게 해서 고쳐야 하는 것, 편집자가 수정이 적합하지 않거나 편집자가 전체 긴 문장을 다시 번역하기를 요청한 부분, 새롭게 발견한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원서를 놓고 다시 문장을 구성하기. 

 

이 중에서 (i),(ii),(iii)는 논리적 순서로도 같이 가는 것이 맡고 심리적 인접성도 있다. 그래서 원고의 물리적 순서에 따라 같이 작업하면 된다. 그러나 (iv)은 그렇지 않다. 번역원고의 원서와의 비교는 번역된 내용이 있는 원서의 부분을 찾는 작업이 개입되기 때문에 (i),(ii),(iii)를 해나가다가 자꾸 (iv)에 부딪히게 되면 흐름이 엄청 끊기게 된다. 

 

따라서 (i),(ii),(iii)을 빠른 속도로 해나가면서, 좀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은 전부 표기를 해두고 별도의 (iv) 작업으로 미루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서 다시 처음부터 표기한 부분만 원서와 대조해나가면서 (iv)만 하면 훨씬 심리적으로 편안하다. 

 

논리적 순서와 심리적 인접성을 염두에 두고 과제 수행을 조직하면 세 가지 좋은 효과가 생긴다. 첫째, 심리적으로 훨씬 덜 괴롭고 리듬감도 더 잘 생긴다. 둘째, 과업 수행에 드는 시간을 착각할 위험이 줄어든다. 셋째, 꾸준히 하기에 적합하다. 이로써 일의 속도를 가늠하지 못해서 일을 엄청 미루는 일을 피하게 된다. 

 

(4) 일의 핵심 뼈대를 완성해놓고, 추가로 살을 붙이기.

과업이 살이 전부 다 붙은 대로 순서대로 완성하게 되면 속도의 가늠을 그르치기 쉽다. 그래서 일의 핵심 뼈대, 그것도 부수적인 부분은 생략한 핵심 부분만으로 구성된 핵심 뼈대를 일단 자신이 설정하거나 외부에서 주어진 마감보다 넉넉하게 80% 이상 완성해 놓는다. 그다음에 나머지 20%를 완성하면서, 이때까지 했던 부분의 살을 붙이고 고쳐나간다.

이 방식에 의하면 과업수행의 완전한 실패는 없게 된다. 또한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요구가 기한을 적정하게 주지 않았을 때 자유인의 대응방식이기도 하다.

 

(5) 최후에 등장할 수도 있고 등장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장인정신

살을 붙일 때에도 가장 중요한 근육을 먼저 붙이고 피부는 맨 나중에 붙인다. 그래서 장인정신은 최후의 순간에만 등장하게 된다.

 

(6) 공책 쓰기와 시간 단위 설정하기 

 

과업이 생각보다 복합적이면 리듬감이 흐트려지면서 막막해진다. 그럴 때는 다음과 같은 기법을 쓰면 된다. 

첫째, 과업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막막한 착수 단계이거나, 다른 일을 하다가 또는 자고 나서 다시 접근하는 재착수 단계이거나, 복합적인 요구사항들이 계속 머리에 떠올라서 간섭하는 경우에는 공책에 일의 구조와 순서, 강조점, 뼈대가 무엇이고 살이 무엇인지를 적어보고 중요한 뼈대부터 채워나가면서 머릿속을 정리한다. 특히 일을 어떻게 하면 쉽게 처리할 수 있을까 하는 관점에서 바라본다.

둘째, 공책에는 일단 앞으로 할 일 중 아주 간단한 형식으로 자른 목전의 것 두 세가지를 적어두고, 그 옆에 시간 단위를 설정한다. 여기서 시간 단위는 15분을 넘지 않도록 한다. 필요하다면 그에 적합한 음악의 힘을 빌린다. 이렇게 하면 일의 중간완수 감각이 살아나서 다음 추동력이 제공된다.

 

6. 기본 자세 : 아메바 훈련

 

이러한 접근 전략을 쓰면 과업을 수행하는 시간이 한낱 수단으로 전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중간 일의 완수의 충족감도 느끼면서 이런저런 전략도 시행착오로 검사해보고, 또 새로운 전략도 수립해보고 하는 일종의 게임과 같은 과정이 된다. 그리고 효과적으로 유사한 일을 몰아서 하게 되므로 몸의 리듬감도 느낄 수 있게 된다.

그런데 뼈대를 일단 완성해 놓고 나면 마음에 여유가 생겨서 오히려 장인정신을 발휘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그러면 또다시 과업을 하는 시간에 본래적으로 불쾌하지 않는 것을 마치 본래적으로 불쾌한 것처럼 느끼는 일이 줄어든다.

 

그런데 이런 접근 전략을 실천하는 데 방해가 되는 외적 요소들이 있다. 이 외적 요소들은 과업 수행의 질이나 즐거움을 높여 주지도 않고 휴식도 되지 않으면서 괜히 정신을 사로잡는 요소들이다.

 

이런 외적 요소를 가려내려면 우리의 의식상태를 네 가지로 나누는 것이 필요하겠다.

 

첫째, 과업과의 상응성이 없는 불쑥불쑥 나타나는 고민과 맥락화를 의미하는 떠오름(occurence)

둘째, 다른 사람이 만든 메시지가 자신의 뇌를 거쳐 지나가고 자신의 뇌를 휘두르도록 허용하는 수동적 정보경유화

셋째, 과제 상응성을 가진 주도적 정신작용

넷째, 자신이 개시와 종결, 중단을 조절하며 그 위치와 내용이 가늠되는 쾌락

 

이 중에서 첫째와 둘째는 과업의 시간을 불필요하게 늘리고 불쾌한 것으로 만든다. 셋째와 넷째는 과업을 하나의 게임으로 바라보도록 하며 진정한 휴식을 가능케 한다.

 

첫째는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걱정 그리고 현재의 위치와 수행에 대한 맥락화를 의미한다. 과거에는 이런 일이 잘못되었지, 불쾌했지, 미래에 어떻게 될까, 현재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가를 불쑥불쑥 과업 도중에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리듬감이라는 것은 거의 사라지고 만다.

둘째는 정해진 휴식 시간에 쾌락을 누리지 않고 과업을 수행하는 도중에 곁길로 새어 다른 사람의 메시지가 여과 없이 자신의 뇌로를 통과하도록 허용함으로써 정신을 오히려 번잡하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이 가치있게 대응해야 할 문제의 자료를 찾는 것도 아닌데 인터넷 뉴스를 보는 것, 번잡한 소리를 하는 SNS를 보는 것, 스마트폰으로 끝없이 연결되어 연속적으로 끌려가서 보게끔 되어 있는 영상을 보는 것, 시리즈가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드라마를 몰아서 보는 것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 두 가지가 하루의 대부분을 채우는 경우 과업 수행은 지리멸렬해지고 뭔가 한 일은 없는데 짜증은 많이 나는 상태가 된다.

 

이러한 의식상태는 최소한으로 줄이고 셋째와 넷째의 의식상태로 깨어 있는 시간을 대부분 채우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

수학문제를 집중해서 푸는 것은 과제 상응성을 가진 주도적 정신작용이다. 보기로 한 논문을 옆에 메모를 해 가며 적어도 반은 한 달음에 보는 것도 주도적 정신 작용이다. 과업을 잘라서 15분 정도 미리 가늠한 속도와 순서에 따라 수행하는 것도 주도적 정신작용이다.2시간짜리 시작과 끝이 있는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쾌락이다. 누워서 필로소피바이츠를 들으며 잠시 쉬는 것도 쾌락이다.(듣는 것과 보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청각적 메시지는 시각적 메시지와 달리 우리를 휩쓸리게 하지 않는다.) 30분 동안 헬스장에서 간단하게 헬스하고 샤워하는 것도 쾌락이다.

 

이 두 가지 의식상태가 대부분을 채우도록 하는 것이 현재를 사는 것이다. 그것은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현재를 사는 사람도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계획한다. 그러나 현재의 과업으로서만 그렇게 한다. 오로지 향후 이 두 가지 의식상태의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만 따로 고민하는 시간에 할당되는 현재의 활동으로서만 그렇게 하는 것이다.

 

7. 과업 수행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 음미하기(appreciation)

 

이러한 모든 전략을 적절히 동원하여도 최소한도의 유쾌한 상태를 일하는 시간에 누리지 못한다고 느낄 수도 있다.

이 경우에는 우선 자신의 기질과 능력에 맞지 않는 과중한 과업을 맡고 있는지 토대부터 점검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특전사를 할 기질과 능력을 갖지 않은 사람이 특전사를 한다면 괴롭기만 할 것이다. 이론 물리학에서 새로운 혁신을 할 기질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 이론 물리학 교수를 하고 있다면 괴롭기만 할 것이다. 몸을 끊임없이 움직이고 사람들과 이야기하지 않으면 참질 못하는 사람이 엉덩이를 붙이고 하루종일 책을 봐야 하는 시험준비를 장기간 한다면 성과 없이 괴롭기만 할 것이다. 사람들이 맛있는 것을 먹건 먹지 않건 대충 영양소만 집어넣으면 되며 음식이야 그 맛이 대동소이하다고 일생동안 생각해온 사람이 요리사 일을 배워도 즐거운 경우는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검토를 하려면 단지 당면한 과업 생활에만 협소하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자신의 인생을 찬찬히 돌이켜 응시하고 비교하는 신중한 작업이 필요하다. 

이보다 더 흔한 경우로는, 과업 수행이 인생의 대부분을 차지한다는 점을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다. 그러나 참으로 성립하면서, 그 참을 언제나 몸소 느끼게 하고 있는 명제를 거부하면 인생이 괴로워진다. 넓은 의미에서의 과업 수행이 인간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넓은 의미의 과업 수행에는 가스비를 내고 세탁을 하고 청소를 하고 운동을 하는 자기관리, 새로운 책을 읽고 기술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새로운 장비를 구성해나가는 학습과 연구, 그리고 좁은 의미의 외부에서 주어진 직업적인 활동을 모두 가리킨다. 이런 넓은 의미의 과업 수행은 모두, 앞 절에서 이야기한 과제 상응성을 가진 주도적 정신작용을 하여야 할 경우다. 

어린 시절에는 그렇지 않았다. 어린 시절에는 과제 상응성을 가진 주도적 정신작용 이외의 활동이 대부분을 차지했고, 과제 수행 활동은 작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 비율이 나이가 지나서 차츰 변하고, 청소년기가 되면 뒤집혀지며, 성인이 되고 나면 완전히 어린시절과 반대의 비율을 갖게 된다. 그럼에도 이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과제를 수행'해야'하는 시간은 비본질적이고 수단적인 시간으로, 과제를 다 마치고 난 시간은 본질적이고 목적 그 자체인 시간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아무런 소망적 사고에 오염되지 않은 채 사심 없는 눈으로 면밀히 관찰하면, 결국 넓은 의미의 과제 수행 활동 이외의 네 번째 정신작용이 일어나는 시간, 즉 자신이 개시와 종결, 중단을 조절하며 그 위치와 내용이 가늠되는 쾌락을 누리는 활동으로 보낼 수 있는 시간은 전체의 작은 부분만을 차지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머리로 아는 것과 철저히 음미하여 깨닫는 것은 다르다. 머리로만 추상적으로 알아도 마음은 어린시절의 지향성을 갖는다. 그래서 실제로는 쾌락적이지 못한  첫 번째와 두 번째의 정신작용으로 그 갈구를 채우고자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도 갈구가 채워지지 않는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인간 조건의 비극 중 하나다. 만일 인간에게 시간이 무한했다면 그리고 인간이 쓸 수 있는 자원이 비할 바 없이 훨씬 더 풍족했다면, 그리고 인간이 더욱 재기 넘치고 재능이 뛰어났다면 네 번째 정신작용이 인간의 삶에서 훨씬 더 큰 부분을 차지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 바라던 사람과 데이트를 하게 되었을 때, 아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 놀이공원에서 놀이기구를 탈 때, 아주 재밌는 영화를 보았을 때 등등 어찌되었건 부작용 없이 순수하게 신난다거나 순수하게 쾌락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을 20살 이후 60살까지 다 합쳐도 불과 1~2년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실제로 인간 삶의 질을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그런 순수 쾌락 시간을 제외한 시간을 보낼 때의 정신의 질이다. 즉 쾌락주의적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한 개인에게 가장 큰 숙제는 어떻게 하면 과제 수행 시 가능한 한 유쾌한 정신 상태를 유도할 수 있을까이다. 그리고 과제 수행 시간에 유쾌한 정신 상태를 방해하는 가장 큰 요소 중 하나는, 과제 수행 시간을 빨리 마감하고 다른 것을 하는 것이 나의 본질이라는 암묵적인 생각이다. 그 생각을 버리는 쪽이 과제에 더 잘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 

실제로 성인이 된 이후의 삶에서 과제가 진정으로 다 끝나는 일이란 생기지 않는다. 하나의 과제가 일단락되면 다른 과제가 또 올 뿐이다. 과제가 없는 백지 상태의 스케줄은 휴가 기간에 상응하는 짧은 기간에 생기도록 의도적으로 조율하지 않으면 좀처럼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일상에서 그런 백지 상태로 주어진 긴 시간을 기대하는 것은 암묵적으로 불안 요소만을 만들 뿐이다. 왜냐하면 이런 시간은 좀처럼 나지 않고 그렇게 한 번에 긴 시간을 보내고 나면 일상의 관리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저녁에 퇴근하고 와서 1시간 정도 운동하러 가려고 해도 이것은 이미 백지 상태의 스케줄에서 벗어난다. 또 운동하고 와서 무엇인가 새로 배우려고 해도 백지 상태 스케줄이 아니다. 청소를 하려고 해도 그렇다. 오히려 퇴근 이후에 곧바로 백지상태 스케줄로 돌입하는 사람은, 여러가지 생활 관리상 문제점에 부딪히고, 자기 발전도 없을 것이다. 

이 점을 철저히 깨닫고 나면 불필요했던 많은 괴로움이 사라진다. 다음 큰 관문은 바로 일의 속도를 조율하는 것이다. 일의 속도를 제대로 조율하지 않으면 과업 수행의 시간은 괴로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의 속도는 그저 빠르게 하거나 느리게 하거나 하는 의식적 결정에 의해 조율하는 것이 아니고 이 글에서 이야기한 여러 전략을 솜씨 좋게 복합적으로 써야 가능한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