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고

[조립물] 모순과 반대

by 시민교육 2020. 6. 1.

두 명제 p, q가 모순이라는 것은 p가 참(T)이라면 q는 반드시 거짓(F)이고, p가 거짓(F)이라면 q는 반드시 참(T)이라는 말이다. 즉 p와 ~p는 모순이다.

 

반면에 두 명제 p, q가 반대라는 것은 P와 q가 모두 참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즉 p와 q는 동시에 거짓일 수는 있다. 따라서 p가 참인데 q가 거짓, p가 거짓인데 q가 거짓, p가 거짓인데 q가 참 세 가지 경우의 수가 모두 가능하다.

 

규범 명제에서 '수범자는 p를 해야 한다'와 '수범자는 p를 해야 한다는 것이 참이 아니다'는 모순이다.

다른 한편으로 '수범자는 p를 해야 한다'와 '수범자는 ~p를 해야 한다'는 반대다. 이 둘은 동시에 타당한 규범일 수는 없다. 그러나 둘 다 부당한 규범일 수는 있다. 즉 수범자는 p나 ~p를 할지 말지와 관련해서 규범적으로 자유로워야 할 수 있다.

위 p의 내용으로 '이슬람교를 믿기'를 대입할 경우에 이 점은 더 분명하게 드러난다.

'수범자는 이슬람교를 믿어야 한다'와 '수범자는 이슬람교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 참이 아니다'는 모순이다.

반면에 '수범자는 이슬람교를 믿어야 한다'와 '수범자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아야 한다'는 반대다.

 

많은 사람들은 논리학을 전혀 배우지 않거나 논리학을 배우더라도 이를 규범양상논리에 응용하는 법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규범 명제에서 모순관계와 반대관계를 혼동하고, 그래서 모순관계에서나 타당한 추론을 반대관계에서 그대로 활용해서 결론을 이끌어낸다.

 

대한민국 헌법 하에서 '국민은 이슬람교를 믿어야 한다'는 거짓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대한민국 헌법 하에서 '국민은 이슬람교를 믿지 않아야 한다'가 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후자의 명제 역시 거짓이다. 타당한 헌법규범은 '국민은 이슬람교든 무슨 종교든 믿거나 믿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규범적 논쟁과 관련하여 'A 당파는 a 쟁점과 관련하여 틀렸다'로부터 'A 당파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는 B 당파가 a 쟁점과 관련하여 옳다'는 결론은 도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A 당파와 B 당파의 a 쟁점과 관련된 주장 모두 각각 어떤 다른 이유로 틀렸을 수 있으며, 다른 주장이 참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모순과 반대를 혼동한 전형적인 경우다.

 

이런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는, 명제들의 결합인 논증의 일관성의 결여를 지적하면서 '모순된다'는 문구를 느슨하게 쓰지 않는 것이 좋다. 즉 논리적으로 모순관계와 반대관계를 혼동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므로, 모순관계를 진술할 때 오직 그 때에만 '모순된다'(contradict with)라는 문구를 쓰는 것이다. 반대관계를 진술할 때에는 아주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대된다(contrary to)라고 써야 하지만, 그렇게까지 부자연스럽게 쓸 필요는 없고, 간단히 '일관되지 않는다' 또는 '비일관된다' 또는 '어긋난다'(inconsisten with)를 쓰면 족하다. 반대관계를 진술할 때 '모순된다'라고 쓰면 이는 논리적으로 틀린 말을 하게 되는 셈이다. 물론 비일관성은 모순관계와 반대관계 모두에서 발생된다. 그러므로 p의 참이 q의 참과 일관되지 않는다거나 어긋난다고 하면 약한 주장(weak claim)을 하는 셈이다. 반면에 p의 참이 q의 참과 모순된다고 한다면 한층 더 강한 주장(strong claim)을 하는 것이다. 약한 주장에 비해 강한 주장은 그 주장이 참이 되기 성립해야 하는 것들이 더 많다. 즉, p의 진리치가 정해지면 q는 자동으로 진리치가 정해진다는 점까지 논증해야 한다. 그런 논증을 하지 않고서도 어긋나고 비일관되는 명제를 열거하고는 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틀린 논증이자 인식적 의무를 위배한 것이다.

 

한편 두 명제는 그 자체로 고립해서만 보자면 그 둘이 모순되거나 반대되는지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 각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 전제로서 성립해야 할 것들이 서로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경우라면, 두 명제는 양립불가능하다.(incompatible) 논증은 보통 한 두 명제를 단적으로 주장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료를 들어 보장책을 매개로 삼아 결론을 뒷받침하는 언어적 활동이다. 그러므로 관련되는 명제들이 아주 많으며, 그 관련된 명제들이 다 명시적으로 거론되지 않는다. 묵시적으로 전제된 명제들을 끄집어 내어 그 양립불가능성(incompatibility)을 타격하는 것은 정교한 논증의 뚜렷한 역할 중 하나다. 그렇게 양립불가능성이 드러난 주장체계는 정합적이지 못하다(incoherent)고 한다.

 

정합적이지 못한 주장은 그 비정합성을 속임수가 되는 개념 속에 숨긴다. 엄밀하지 못하며 단지 화자가 어느 쪽 당파와 친화성이 있는가를 보여주는 신호 역할을 하거나, 뒷받침 명제의 결여를 은폐하고는 주어진 결론에 동의하지 않으면 어떤 비인식적인 이유에 의해 타격을 받으리라는 것을 암시하는 개념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개념들은 매우 두꺼운 개념(thick concept)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X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이다'라는 진술은 '**한'이라는 두꺼운 윤리적 개념을 취함으로써 논증 없이 이미 상정된 청중들 사이에서 지배적인 견해에 아첨하면서 눈치의 더듬이를 세워 그 견해에 재빨리 영합하지 않는 이에게는 여러가지 비난과 귀찮음, 짜증, 더 나아가서는 법률적 불이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강도의 제재가 가해질 것이라는 암시를 준다.

 

이런 두꺼운 개념들이 여럿 생기면 그것들 자체가 일종의 연상작용을 자아내는 언어적 망을 이루게 되어 순환적으로 개념들을 돌려 써 가 막으면서 그것이 엉터리임을 숨기게 된다. 분석적 훈련을 거치지 않은 사람들은 인식적 이유와 비인식적 이유들을 구분할 역량이 없기 떄문에 이런 엉터리를 제대로 알아채지 못하고 속아 넘어가며 자신이 타당한 규범체계를 주장하는 쪽에 있다고 착각하게 된다.

 

만일 이런 작위적인 두꺼운 개념들에 익숙해지지 않았더라면, 개념들로 캡슐화되지 않은 채로 원래의 명제들을 볼 수 있었을 것이며 인간의 오성은 그러한 명제들의 양립불가능성을 파악했을 것이다. 반면에 개념들로 캡슐화된 명제들은 시야에서 가려져 있어서 그 양립불가능성 역시 가리며, 그래서 모순되거나 반대되는 명제들을 한꺼번에 주장하면서도 이러한 비정합성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오개념(misconcept)이나 오관념(misconception)에 익숙해지는 것은 백지 상태(blank slate)보다 훨씬 못하며, 이런 오개념이나 오관념을 듬뿍 뒤집어 쓰는 것을 학습이라 여기며 몰두하는 자는 그저 기본적이고 담백한 언어를 쓰고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볼 수 있었던 것마저도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 빠지는 지름길을 내달리는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