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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요약번역] 부모의 의무에 대한 칸트의 정당화

by 시민교육 2021. 2. 20.

제목: Heiko Puls, “Kant’s Justification of Parental Duties”, Kantian Review, Vol.21, No.1, 216, 53-75.

번역: 이한

 

[참고: Immanuel Kant, Die Metaphysik der Sitten, 백종현 옮김, 윤리형이상학, 아카넷, 2012, 가정사회의 권리[가족법], 2, 친권[양친법]

§28

p219-221. 인간의 자기 자신에 대한, 다시 말해 그 자신의 인격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220) 의무로부터 두 성이 인격적으로 교호적으로 서로, 대물적인 방식으로, 혼인을 통해 취득하는 권리가 나왔던 것과 똑같이, 이 공동체에서의 출산으로부터 그 공동체가 출산된 자를 보호하고 부양할 의무가 나온다. 다시 말해 자식들은 인격으로서 이로써 동시에 그들이 스스로 생존할 능력을 가질 때까지 양친에 의해 부양받을 근원적으로-본유[생래]적인(상속된 것이 아닌) 권리를 갖는다. 그것도 법칙에 의해 직접적으로 말이다. 다시 말해 이를 위해서는 어떠한 특별한 법적 행위가 필요하지 않다.

무릇 출산된 자는 하나의 인격이고, 자유를 품수한 존재자의 출산을 물리적 조작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출산 행위(221)를 그것을 통해 우리가 한 인격을 그의 동의 없이 세상에 내놓고, 독단적으로 내보낸 그러한 행위로 보는 것은 실천적 견지에서는 전적으로 옳고도 필연적인 생각이며, 이제 이러한 행동에 대해서 양친에게는 그들의 힘이 닿는 데까지 이 인격이 자기 상태에 만족하게 할 책무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양친은 그 자식을 마치 그들의 제작물-무릇 이러한 것은 자유를 품수한 존재자일 수가 없다-인 것처럼 그리고 그들의 소유물처럼 파괴하거나 단지 우연에 내맡겨 버릴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식에서는 한낱 세계존재자뿐만 아니라 또한 세계시민이 양친에게 이제 법의 개념들에 따라서도 아무래도 좋은 것일 수가 없는 상태로 이끌려져 있기 때문이다.

§29 이 의무로부터 또한 필연적으로, 자식이 자기의 육신 사용과 지성 사용을 아직 제대로 할 힘이 없는 동안에는, 양육과 보호 외에도 자식을 가르치는, 자식의 감독과 교육에 대한 양친의 권리가 나온다. 그것은 자식이 장차 스스로 생존 발전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실용적으로도 그러하고, 도덕적으로도 그러하다. 그렇지 않으면 자식을 방임한 죄과가 양친에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양친은 그들이 명령하는 아버지의 권리와 이제까지의 양육과 노고에 대한 비용 상환에 대한 모든 요구를 단념하는 내보냄[방면/출간]의 시점까지 이를 행할 권리를 갖는다. 그 대신에 그리고 교육이 완료된 후에는 양친은 자식들에게 (양친에 대한) 책무를 순전한 덕의무로서만, 곧 감사의 의무로서만 부과할 수 있다.

자식들의 이러한 인격성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자식들은 결코 양친의 소유로 간주될 수는 없으되, 그럼에도 (그들은 마치 양친에 점유되어 있는 것처럼, 심지어는 그들의 의지에 반하여 어느 타인의 점유로부터도 양친의 점유로 되돌려질 수 있기 때문에) 양친의 나의 것과 너의 것에 속하므로, 양친의 권리는 순전한 물권이 아니며, 그러니까 양도할 수 없는 것이되, 그러면서도 한낱 대인적 권리가 아니라, 대물 방식의 대인적 권리이다. 참고 끝.]

 

Austin 2007, Prusack 2013은 법철학(MM, 6: 280-1)(주석 1)의 문구만 언급한다. 여기서 칸트는 재생산으로 인해 부모가 사람을 그 사람의 동의 없이 세계에 오게 하였다는 사실에 의해 아이를 돌볼 부모의 의무를 정당화한다.(주석 2) 그들은 칸트가 그의 접근을 정당화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나는 칸트의 Nachlass, Lectures Feyerabend, Mrongovius, Pölitz, Vigilantius가 칸트의 고려사항에 기반한 부모 의무 이론에 대한 주의 깊은 정당화를 담고 있다고 논할 것이다.

 

53

칸트는 MM, 6:280-1에서 상이한 종류의 부모의 의무를 강조한다. 한편으로, 아이를 물질적으로 돌볼 부모의 의무다. 다른 한편으로, 아이가 그 존재의 조건에 만족하게 보장할 도덕적 의무. 나는 이 입장은 부모의 의무의 인과적 정당화라고 논한다. 왜냐하면 칸트는 아이의 행복에 대한 필요를 만족할 의무를 부모의 자유와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아이와 그리하여 아이의 필요도, ‘그들의 성 공동체의 자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HN M, 19:470)

 

55 인간의 생식은 칸트에 따르면 보통 자유로운 결정에 기반한다. 아이를 임신하는 것은 부모의 합리적 통제 하에 있는 것이다. 아이는 통제할 수 없는 부모의 성적 충동의 결과가 아니다. 그러므로 출산의 능력은 단지 생물학적 능력 이상의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선험론적인 차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임신된 사람은 이 특정한 인간 능력의 효과이다. 즉 성교로 사람을 세계에 오게하는 능력의 결과이다. 그리하여 이 즉발성에 의해서 새로운 시작을 창조하는 능력의 결과이다.

 

이 연합체의 출산으로부터 남자와 여자의 자유의 이 사용의 후손보존하고 돌볼의무가 따라나온다. 이 행위로, 사람으로서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에 의해, 그들 스스로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돌봄을 받을 선천적 권리innate right’가 있다. (...) 칸트는 아이가 부모에 대하여 권리를 갖는 이유는 부모의 자유 활용에 기반하고 있다고 말한다.

 

57 KantBemerkungen zur Rechtslehre 그리고 Vorlesungsnachschriften zur Moralphilosophie. 전자의 책에서 칸트는 아이의 임신을 인간이 태어나게 하는’ ‘커플의 물리적 행위라고 정의한다.(HN BR, 20: 445). 그는 이로부터 두 의무를 도출한다: 첫째, ‘[아이의] 삶을 보존할의무와 그것의 존재를 유지할 의무. (HN BR, 20:245). 둘째, ‘[아이가] 그 존재에 계속해서 행복해하도록 도울의무와 삶의 유쾌한 향유를 지지할 의무. (HN BR, 20:245). 칸트는 그가 MM에서 그러는 것보다 의무를 한층 더 명료하게 구분한다. 하나는 아이를 돌보고 아이의 삶을 물리적으로 보존할 부모의 법적 의무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도덕적 의무이다. 그는 아이를 물질적으로 돌볼 의무를 강제적 의무라고 다른 곳에서 칭한다. (LV, 27: 670)(주석 9) 즉 이행되지 않으면 법에 의해 제재될 수 있는 법적 의무라는 것이다.

 

그들의 아이를 행복하게 할 의무를 부모가 진다는 것은 매우 그 뻗치는 범위가 넓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통상의 경우에 다른 사람의 행복 일반을 증진할 의무에 관한 칸트의 다른 진술과 들어맞지 않는다. MM 6: 387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자기 능력이 닿는 데까지 증진할 도덕적 의무를 설명하지만, 그는 또한 그렇게 할 가능성은 다소 제한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개인의 행복의 구성과 행복이 발생하는지 여부는 수많은 통제할 수 없는 요인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칸트는 또한 원칙적으로 이행할 수 있는 경우에만 무엇인가를 할 의무가 있다는 점을 주목한다.(‘ultra posse nemo obligatur’, cf. LMET K2, 28: 774) 그러므로 칸트는 왜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의무를 반복으로 강조하는가? 게다가 왜 그 의무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을 증진할 도덕적 의무를 훨씬 넘어서 가며, 원칙적으로 온전히 이행될 수 없는 것이 될 수 있는가?

 

이 지점에서, 왜 두 사람이 또 하나의 사람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도덕적 의무를 넘어서는, 그 사람에 대한 특정한 의무에 이르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된다.

 

[첫 번째 논거는 무엇보다도, 인과적 논증이다. 그것은 아이의 존재의 창조자로서 부모의 역할에 기반하고 있다. 자유로운 결정으로 부모는 잠재적 인간을 세계에 오게 하였으며, 그렇게 온 사람이 스스로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그 사람을 돌봐야 하며, 부모는 그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 의무가 있다. 임신 행위에 대한 칸트의 정의와 결과를 MM에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칸트에 따르면 누군가를 세계에 놓는 것또는 존재하도록 끌어내는 것누군가를 우선 어떤 조건으로 오게 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부모들이 그들 자신의 주도로 아이를 세계에 두었으므로, 그들은 아이들을 그들의 조건에만족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58) 아이가 행복해야만 하는 조건은 존재의 조건이다. 이것이 그 부모가 아이를 창조한 조건이다.

 

우리 자신의 말로 우리는 이 입장을 다음과 같이 기술할 수 있다: 자유로운 행위로, 사람들은, 아무런 조건도 갖지 않았던 사람을, 어떤 조건으로 오게 한다.-존재의 조건으로. 이것은 그들을, 이 사람이 이 조건으로 온 것에서 발생하는 필요들을 충족시키는 데 책임을 지게 만든다. 엄밀하게 말해서, 부모들은 아이의 필요를 창조하지는 않았지만, 그들은 인간으로서 아이가 필요들을 가지리라는 것을 아는 그런 아이를 창조하였다.

 

그 사람의 필요는 일정한 인과성의 효과로서, 성의 연합체의 자유효과로서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녀의 존재에 책임 있는 사람들은 이 필요들이 만족되도록 보장해야만 한다.

 

58 [인과적 이유가 작동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물질적 조건은 아이의 물질적 필요에 충족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물질적 필요는 부모가 성 공동체의 자유를 행사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충족해야 할 의무가 생긴다.

다음으로 아이는 단지 물질적 필요만 충족하는 것이 아니라 행복에 대한 필요도 충족해야 한다. 행복이란 존재의 조건에 만족하는 것이다. 이러한 행복에 대한 필요도 부모가 성 공동체의 자유를 행사한 결과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이를 충족해야 할 의무를 진다.

, 부모가 출산한 인간의 필요의 존재에 인과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

 

[인과적으로 관련된 이에 대한 의무는 일반적으로 다른 이에 대한 의무와는 차이가 난다.

차에 치인 사람을 보면 경찰을 부르고 응급처치를 할 도덕적 의무만을 진다.

내가 어떤 사람을 차로 치었다면 일반적 의무를 넘어서는 법적, 도덕적 의무를 진다. 경찰을 부르고 응급처치를 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에게 그 사고로 발생한 그 어떤 잠재적 필요도 보상할 의무를 진다.]

 

59 [해악의 인과적 원인이라는 잘못을 저질러 생긴 책임(guilt)은 보상되어야 한다.

그런데 칸트가 MM, 6: 387에서 강조하듯이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고, 오직 행복을 증진하려고 시도할 수만 있다. 부모의 경우에도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수는 없다. 왜냐하면 이는 통제불가능한 많은 요인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행복하게 만들 의무를 현실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는 아이의 행복을 증진하려고 시도할 의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시도의 부담은 매우 높다. 그들이 출산한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의무를 부모는 진다는 현실적으로 해석한다면, 의무의 가장 가능한 높은 부담을 표현하는 것으로, 완전하게 이행될 수는 없는 규준이다. 사고를 야기한 사람과 사고 피해자와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그 의무는 일정한 배제성과 강도를 갖는다. 부모는 아이의 행복의 실현에 있어서 가능한 한 아이를 지원하는 데 온전한 책임을 느껴야만 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웃의 아이의 행복을 증진하는 것에 대해서보다는 유의미하게 훨씬 더 그렇게 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59 [그러나 이렇게 현실적으로 해석하여도 여전히 문제가 발생한다.

위험1: 행복에 대한 부모의 관념을 단지 이전할 위험 --> 이것도 방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MM 6:454에서 칸트는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나의 행복 개념에 따라 좋은 일을 할 수 없다.’고 한다.]

 

60 [이와 같이 다른 사람의 행복 일반의 증진에 참인 것은, 자녀 자신의 아이의 행복 증진이라는 도덕적으로 더 중요한 의무에는 한층 더 참이다. 그러므로 자녀에게 부모의 자신의 행복 개념에 따라 좋은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될 의무는 강력하다.

의무의 한계: 그 행복을 증진하기 위해 비도덕적인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 (cf MM. 6:280) 아이의 행복을 위해 도둑질, 살인은 하여서는 안 된다.

일반적으로는 또한 자신의 행복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MM 6:393)

그러나 부모의 경우에는 이와는 달리 자기 행복쪽에 유리하도록 설정하게 만드는 한계는 없다. 이 경우에는 부모의 행복이 아니라 아이 자신의 행복이 기준이 된다. (e.g.아이 등록금으로 아이에게 외제차를 사 줄 수 없다.)]

 

언제까지 의무를 지는가? 모호한 문구만 있을 뿐이다.

MM 6:280 스스로를 돌볼 수 있을 때까지 돌봄 받을 권리.

 

61 [이 물질적 보살핌 의무는 특정 기계적 시점에 의해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연령에 의해 기계적으로 한정될 수 없다왜냐하면 인과적 관련성에 의해 발생되는 도덕적 의무가, 사회적 관습에 의해 그렇게 쉽게 절단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일자리를 얻으면 자율성 획득의 징표이기도 하므로, 일응 해소된다. 그러나 교육에서 새로운 단계를 밟거나 해서 다시 스스로를 돌볼 수 없으면 의무는 제거되고 기간은 늘어난다. 그래서 의무의 종결은 절대적이거나 최종적이지 아니하면 아이의 발달과 조건에 달려 있다. 즉 스스로를 돌 볼 수 있는가를 중심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행복하게 만들 의무의 종결 시점은? 없다. 아이가 허락하는 한 최선을 다해 행복에 도달하도록 자신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 HN, 20L465--> ‘행복한 존재의 지속’, 행복하게 지속하기 능력이 없어진다면 어른 자식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해야 한다.]

 

62 칸트의 정식화가 이행될 수 없을 것 같은 의무 내용을 갖는 이유는, 사람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주 멀리 영향을 미치는 윤리적으로 예외적인 범주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 충족이 의문스럽거나 가능성이 낮은 필요로 강하게 특징지어지는 상태로, 사람을 동의없이 오게 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문제적이라고 생각한다.

[Vorlesungsnachschriften에서 칸트는 인간은 출산과 출생으로 잠재적으로 해악을 입는다고 한다.]

[Vorlesungsnachschrift naturrecht Feyerabend에서 칸트는 말한다.] “부모의 아이에 대한 권리는 그들 자신의 의무에 기반한다. 부모들은, 그 존재를 행복하게 만들려고 출산한다. 그들이 출산하였고 이것은 행위이다. 만일 부모들이 아이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들은 해악을 입힌 것이다. 이는 잠자고 있는 사람을 안전하지 못한 장소로 이동시킨 것과 마찬가지다.(LF, 27:1380)”

 

[부모가 아이의 행복을 돌보지 않으면 아이에게 해를 가하는 것이다. 이는 안전하지 못한 장소에 옮겨 놓고 보호하지 않으면 해를 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63 [Vorlesungsnachschrift 에서는 비대칭성 강조한다. LM 27: 1412]

아이의 출산은 부모가 아이에게 의무를 취하게 만든 의무지는 행위이다. 그러나 아이가 그들의 부모에게 출산 때문에 의무를 지는지는 증명되어야 할 문제로 남아 있다. 왜냐하면 존재는 의무가 아니며 또한 존재는 그 자체로 행복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우 불행하게 되기 위해서는 거기에 존재해야 한다.”(LM 27:1412)

 

[이 구절에 따르면 부모 자식의 의무관계는 일방향이다. 존재는 행복 그 자체가 아니고 행복이나 불행의 필요조건이다. 이 이유로 부모는 엄격한 의무를 지고 그 역은 아니다. 존재는 아이가 부모에게 감사해야 하는 은혜(boon)가 아니다. 이 점은 칸트가 다른 곳에서도 명시적으로 강조했다.]

 

아이에게, 부모가 그의 물리적 존재의 원인이라는 사실로부터는 사랑이 자라나올 아무런 근거도 없다. 그것은 감사를 낳는 은혜가 아니다.”(LV, 27: 670)

 

64

칸트는 그러므로 부모의 권리를 의무의 법(law of obligations)이라고 여긴다. 이 관념은 특히 Reflexionen zur Rechtsphilosophie (HN M, 19:468-70)에서 등장한다. 출산 행위는 함께 범한 범죄행위와 마찬가지로 부모를 함께 구속한다.(주석 12) 그것은 잠재적 인간으로서 아이를 향한 죄책 있는 행위이다. 왜냐하면 아이가 이 방식으로 부모에 의해 세계로 왔기’(HN M, 19:470) 때문이다. ‘여기에 누군가 다른 사람의 권리 때문에 발생한 것은 아닌 잘못을 저질러 생긴 책임(guiltiness)의 사례가 있다’(HN M, 19:353). 그리고 그는 아이를 향한 부모의의무는 잘못을 저질러 생긴 책임으로 인한 엄격한 의무)severe duty of guiltiness)라고 한다.(HN M, 19:97) 잘못을 저질러 생긴 책임처럼, 부모의 책임은 다른 사람에 대한 모나 부의 의무를 훨씬 넘어서는 내용을 갖는다.

 

3. 행복에 대한 칸트의 염세주의와 부모의 의무의 정당화에 대한 개관

 

칸트는 행복의 문제 면에서 그래서 인간의 존재의 면에서 경험 세계의 지위에 관한 강한 염세주의를 반복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세계에서 인간이 행복하게 될 전망이 너무나 낮다고 생각하여, 그 어떠한 합리적인 인간도, 그의 생애 마지막에서, 다시 존재하기를 바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여러 저술에서 칸트는 존재하지 않는 것, 그래서 괴로움을 겪을 능력이 없게 되는 것이, 괴로울 잠재성을 지닌 존재에 대하여 우위점이 될 수 있다는 생각까지 보여준다. 칸트의 저술에서 이러한 이념의 존재는 그의 전기 작가 Borowski에 의해 또한 발굴되었다.(주석 13)

 

칸트는 행복의 균형(재정적 균형과의 유비를 통해)과 삶의 관련된 가치를 그의 저술 여러 곳에서 논급한다. (...) 칸트는 <판단력 비판>Critique of Judgement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어떤 종류의 가치를 삶이 우리에게 줄 것으로 갖고 있는가를 판단하기란, 만일 우리가 삶에 의해 향유하는 것에 의해서만 평가한다면, 쉽다. 0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동일한 조건에서, 심지어 새롭고 자기 스스로 고안한 계획에 따라 (그렇지만 여전히 자연의 경과는 벗어나지 못하면서) 그렇지만 여전히 단지 즐거움만을 목적으로 하면서, 새롭게 삶을 시작할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CJ, 5: 434n.)

 

칸트는 행복의 균형을 살펴보고 이에 대응하는 합계를 결정한다. 이 관점에서 삶의 가치는 평가하기 쉽다. 그것은 음이다. ‘0보다 작다.’(주석 16) 이 평가의 이유는, 어느 누구도 자신의 삶을 반복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칸트는 인간의 불쾌한 감각은 유쾌한 감각을 능가한다고 본다. 괴로움은 행복을 능가한다. 행복을 필요로 하는 존재로서는, 다시 존재하기를 바랄 수 없다. 이 진단은 인간 존재 일반에 적용된다. 그것은 또한 -개별 삶과 독립적인-, ‘새롭고 자기가 고안한 계획에 따른것으로 상상된 가능한 인간 삶에도 적용된다. 그런 삶도 여전히 자연의 경과는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 칸트가 인간 존재에 내재해 있다고 여기는 행복과 불행의 비대칭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이 평가는 개인의 경험 때문에 삶에서 등을 돌린 괴로워하는 사람의 잠재적으로 편향된 판단이 아니라, 이성의 판단이다. 그래서 합리적인 평가이다. ‘Miscarriage’(T, 8: 253-71)에서 칸트는 세계에 괴로움이 우세하다는 주장이, 누구나-그 사람의 삶이 얼마나 나쁘건 상관없이- 죽기보다는 살고 싶어한다는 사실에 의해 부정된다고 하는 발상을 한낱 궤변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궤변에 대한 답변이 건전한 정신을 가진 인간 누구에게나 남겨져 있다. 이 건전한 정신을 가진 사람, 판단을 내릴 정도로 충분히 오랜 기간 삶을 살아보고 삶의 가치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본 사람은, 그가 인생이라는 게임을 한 번 더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는지 질문을 받았을 때, 같은 여건에서뿐만 아니라 그 어떤 여건에서도 그는 기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한 다른 삶이 공상적인 세계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이 현실적인 세계에서 전개되는 것이라는 전제에서 말이다.) (T, 8: 259)

 

판단력과 이성을 가진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서, 오래 살았고 삶의 가치에 관하여 오래 곰곰이 생각해본 사람은, 세계에는 음울함이 우세하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며 그의 존재를 반복하고 싶어하지 않을 것이다. 칸트는 이 사고가 새로운 여건에서 전개되는 가상적인 상상된 삶에도 적용된다고 덧붙인다. 그렇게 전기적으로 최적화된 삶이라 할지라도 현실적인 세계에 속박되며 그래서 합리적 이유들로 거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Nachlass Anthropologie에서 우리는 이 감성의 더 나아간, 더 정확한 정식화를 찾을 수 있다.

 

삶이 적극적 가치나 소극적 가치를 갖는지에 관한 판단에 도달하기 위해서, 어느 누구도 죽고 싶어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고려해서는 안 되고, 그 어떤 합리적 존재라도 같은 여건에서 다시금 살고 싶어하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그렇지 않다면, 삶은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 가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러하다. (HN A, 15:602)

 

칸트의 강한 염세주의와 관련하여 이 논제에 의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이것은 쾌락주의에 반대하여 개진된 논증일 뿐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행복이 쾌락의 긍정적 감각에 한정된다면, (66) 인간은 정말로 다시금 삶을 지속하기를 원하지 않을 수 있다. 쾌락의 긍정적 감각만 살펴보는 관점은 제한된 관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행복은 우리의 감각적 경향성을 만족하는 것 그리고 이에 상응하는 쾌락과 편의의 강도와 지속성에만 주로 관련되지 않는 더 정교한 차원을 갖고 있다. 이 행복은 우리가 설정한 목적을 충족하는 것, 즉 우리의 자유 실현에 의해 올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두 번째 측면, 행복의 우선적 측면(preferentialistic aspect)가 칸트의 저술에서 발견될 수 있다.(주석 17) 그러나 이것은 칸트에게 깊은 염세주의가 있다는 주장에 대한 반론이 되지는 못한다. 그가 왜 다시 존재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한 광범위한 해명을 제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남는다. ‘현실 세계의 조건은 일반적으로 이 가상적 선택지를 비합리적인 것으로 만든다. 여기서 한 측면은 다시금, 행복 개념의 쾌락주의적 차원에 관한 운의 부정적인 수지(negative balance of luck with regard to the hedonistic dimension of the concept of happiness) ‘행복의 총합은 항상 음이다. 그러나 두 번째 측면이 정확히 우선권을 갖는 측면이다. 칸트의 논급 중 일부는 그의 염세적인 평가가 행복의 이측면에도 적용된다는 점을 드러낸다:

 

누구나 이 세계에서 자기 운명에 대한 자기만의 계획을 형성한다. 그가 얻기를 바라는 기량, 그가 그 기량으로부터 기대하는 미래의 영광과 여가, 결혼생활에서 얻는 오래 가는 행복과 오래 지속되는 기쁨과 모험이, 그가 그의 상상에서 솜씨 좋게 끌어내고 잇달아 생생하게 역할을 하게 되는 매직 랜턴의 이미지를 구성한다. 이 그림자극(shadow play)에 끝을 내는 죽음은, 오로지 멀리 보이지 않는 곳에만 모습을 나타내며, 더 유쾌한 장소에 드리워진 빛에 의해 희미해지고 인식할 수 없게 된다. 이 몽상을 하는 동안 우리의 진짜 운명은 우리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이르게 한다. 우리에게 정말로 허락된 몫은 우리가 우리에게 약속한 것과 비슷하게 보이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각각의 단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대(anticipation)가 우리를 기망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은 자신의 일을 바삐 하며, 여전히 멀리 떨어져 있어 보이는 죽음이 갑자기 게임 전체를 갑자기 끝내기 전까지, 새로운 계획을 그려내는 일에 싫증을 내는 법이 없다. (VS, 2:241)(주석 18)

 

현실의 세계의 조건역시 행복의 이 차원에 들어간다. 그것은 인간의 자유에 의한 삶의 계획의 실현과 관계된다. 칸트의 입장은 이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로 염세적이다: 스스로 만든 계획과 일과 인간 관계에서 자기 실현은 한낱 키메라이다. 그것들은 그림자극’, ‘매직 랜턴의 이미지또는 몽상이다. 우리의 삶에서 자유롭게 발전시켜온 현실은 계획과 목적에 드물게만 부합한다. 각각의 단계에서 우리는 우리의 기대에 기망되었다는 사실을, 인간 상상력의 이 게임을 죽음이 끝낼 때까지 발견한다. (67) 행복의 우선적 측면과 관련하여, 칸트는 염세적 입장을 또한 옹호한다. ‘현실 세계의 조건의 이 측면은 또한 다시 존재하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게 만든다.

 

4. 칸트적 출산 윤리

 

(...) 만일 현실 세계의 조건에서 인간이 그의 삶을 반복하기를 합리적으로 바랄 수 없다면, 결코 출생되지 않을 잠정적 권리가 있을 것이다.

 

인간 생식의 윤리적 의문스러움은, 결과적으로 도구화에 대한 칸트적 금지를 전제할 때 또한 그럴법한 것으로 보인다. 데이비드 베너타는 또한 존재하게 됨으로써 사람은 동시에 목적으로 대우 받는 것이 아니라 항상 단지 수단으로만 대우된다는 점을 지적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자신을 위해 사람을 세계에 오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주석 19) 데이비드 베너타는 통상의 생식은, 예를 들어, 그의 아픈 형이나 언니를 위해 골수를 얻고자 하는 유일한 목적을 위해 출산되는 사안보다 도덕적으로 조금이라도 덜 문제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두 사안 모두에서, 아이는 그 아이 자신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Benatar 2006, 129-30)(주석 20)

 

[68 칸트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논하지는 않지만 부모들의 결단과 주도로(on their own initiative) 그리고 아이의 동의 없이 사람을 존재하게 만든다고 진술할 때, 그는 도구화 금지 적용에 관하여 힌트를 준다. 독일어로 칸트가 여기서 사용하는 eigenmächtig (on one’s own initiative) 이라는 용어는 부정적인 함축connotation을 가지며 다른 사람들의 책임 또는 권리를 개의치 않는것으로 흔히 설명된다. 부모들 자신의 주도와 결단 및 임신된 사람의 동의의 결여에 대한 언급은, 아이들이 그들 자신을 위해서 출산될 수는 없으며 아이들의 출생은 부모들의 행동이나 의도의 결과에 불과하다는 문제에 대한 칸트의 자각을 확인해준다. 칸트가 LP MI, 28: 295에서 인용된 구절에서 쓰길, 출산은 단지 그들의 경향성에, 그들의 변덕에기반하고 있다고 한다.(주석 21) ]

 

[그러나 칸트가 인간 출산에 관해 고려하는 것은 목적론적 고려도 있다.] 인간 역사 그 자체는 객관적으로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 역사는, 마치 현명한 자연이 인간과 그들의 능력을, 인간이 그들의 능력과 재능을 역사가 진행되면서 발전시키도록 구성한 것처럼 간주될 수 있다. 가능한 목적에 대한 이러한 상정은, 인간이 그들 자신의 목적을 설정할 수 있는 능력 덕분이다.(cf. CJ, 5:431)

 

반성적 판단에 의한 역사에 대한 이런 해석에서는, 의미는 전쟁이나 자연재해와 같은 악에게까지 귀속될 수 있다. 종국에는 처음에는 목적과 조화되지 않는- 그러한 요인들도 여전히 인간의 발전을 증진한다.(cf. MA, 8:121)

 

이 맥락에서, 칸트는 또한 성의 혼합, 인류의 도덕적 진보가 기반을 두고 있는 것으로 언급한다.

 

성의 일반적 혼합에 의하여, 이성이 부여된 우리 종의 삶은 진보적으로 유지된다. 이 종이 (전쟁에 의해) 그 자신의 파괴를 향해 의도적으로 작업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합리적 존재가, 전쟁 와중에도 계속하여 문화에서 자라난 그런 존재가, 결코 다시는 퇴행하지 아니할 상태인 미래 세기의 인간 종의 행복한 사태의 전망을 분명하게 나타내는 것을 막지 않는다.(AP, 7:276)

 

인간 출산은 인간 종의 이성의 발전을 보존한다. 비록, 그 세대들의 와중에, 이 발전에 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전반적으로, 이 역사적 과정과 그 과정을 구성하는 세대들의 연쇄는, 인류 전체가 점점 더 도덕적으로 완전해질 뿐만 아니라 아마도 더 높은 행복 상태에 이르게 되는 과정으로 생각될 수 있다. 생식과 종의 보존의 목적 배후에는 자연의 계획a plan of nature이 있다. 한 명의 개인에게는 부인되는 것이 종의 역사라는 이 관점에서는 충족된다.

 

다른 동물들은 개별 개체들이 자신의 목적에 도달하지만, 인간은 종으로서만 인간 본성의 전체 목적에 도달할 수 있다.”(HN A, 15:887)

 

세대들의 연쇄는, 인간의 생식에 기반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식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개인은 결코 달성할 수 없는 것, 즉 적어도 인간 종으로서는 최대한 가능한 도덕적 완성 상태. 칸트는 개인들이 출산을 통해 변화할 가능성, 그렇지만 종으로서의 의식은 여전히 유지될 가능성이라는 관념까지 살펴보기도 한다.

 

이 목적론적 차원에서는, 간접적인 도덕적 기능이 출산에 부여된다. 그것은 개인의 도덕적 완성이나 행복 상태를 야기하지는 않지만, 전체 인류의 도덕적 완성은 야기한다.

 

이 두 견해가 필연적으로 상충하는 것은 아니다. 인류 역사에 관한 목적론적 관점의 목적은 인류의 발전에 관련된 잠재적인 윤리적 문제들을 식별하는 것이 아니고,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를 드러내지 않는, 즉 그 자체로는 판단을 결정하는 양태에서 인간의 자기 관념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사실에 의미를-적어도 반성적 판단의 양태로- 귀속시키는 것이다. 인류 역사 그 자체는 아무런 현명한 창조의 계획도 드러내지 않는다. 아무런 의미 있는 과정도 그 안에서 객관적으로 감지될 수 없다. 그러나 진보라는 규제적 이념을 가지고서 역사를, 마치as if 인간 완성을 목적으로 하는 비밀스러운 계획에 기반한 것처럼 인식할 수는 있다. 종국에는 가능한 더 높은 그리고 도덕적인 의미가, 이 흐름에서, 처음에는 무의미하게 보일 수도 있는 출산의 연쇄에도 귀속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칸트는 ‘(...) 오직 마지막 세대만이 그들의 선조들이 힘들게 노력해 왔던 긴 역사 위에 구축된 것에서 살아갈 행운을 누릴 것이다라고 하면서 이것을 곤혹스러운사실이라고 칭하였다.(I, 8:20) 설사 진보라는 이념이, 세대의 연쇄를 통한 인류의 완전성이, 개별 인간의 지성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층(substratum)-그의 인간성을, 도덕적 능력과 완성을 향한 발달을- 나타낸다고 하여도, 칸트는 이 목적론적 해석이, 개별 인간이, 이를테면 목적으로서가 아니라 한낱 수단으로서 자연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라는 문제가 되는 생각을 함축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칸트는 개인의 괴로움과 역사 과정이 객관적인 관점에서는 목적의식이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의미 있는 인간 존재라는 이념을 고수한다.(주석 22) 세계의 목적의식 있음에 역행하는 본질과 인간 존재에 대한 방해물을 고려하고도, 그는 인간이 전혀 없다면 더 나을 것이라고 결론 내리지 않는다. 반성적 판단의 양식에서, 그는 그렇기 보다는 세계를 인간의 목적 결정과 자기 이해와 양립가능한 하나의 체계로 인식한다. 인간은 그래서 그들의 존재가 무의미하지 않기를, 그래서 새로운 인간의 창조가 이 계획에 속하기를 계속 희망할 수 있다. 초기 칸트는, 인간에게 실존적으로 중요한 질문들을 평가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그런 도덕적으로 실천적으로 동기부여된 편애성을 기술한다:

 

그러나 그 이해의 저울은, 어쨌거나, 전적으로 불편부당하지 않다. 비문이 쓰인 팔의 한 쪽에는: 미래에 대한 희망이 기계적 우위를 가고 있다. 그리고 그 우위는 심지어 약한 이유들도, 저울의 적합한 쪽에 올려지면, 그 자체로 더 큰 무게를 갖고 있는, 추측이 다른 쪽 위로 오르도록 한다. 이것은 오직 결함일 뿐이고, 내가 쉽게 제거할 수 없는 결함이다. 실제로, 그것은 내가 제거하기를 바라지도 않는 결함이다. (DS, 2: 349-50)

 

5. 결론

부모가 아이를 행복하게 만들 의무를 진다는 사실은 특히 멀리 미치는 것이며, 아마도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은 부담’(Prusak 2013: 30)일 것이다.

71 MM에서 칸트는 이 의무를, 사람을 그 사람의 동의 없이 그리고 부모 자신의 결단과 주도로 존재하게 하는 출산 행위를 근거로 하여 정당화된다. 이 의무는 문제적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증진할 의무만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모는 아이의 존재에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으며, 실천적 의미에서, 또한 그 행복의 필요에도 인과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적어도 아이의 행복을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as much as they can) 기여할 도덕적으로 배타적인 의무를 진다.[역자-다른 사람들은 그 아이의 행복에 대하여지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의무를 혼자서만 진다.] 칸트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의 증진을 넘어서는 이 부담을,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 의무를 부모가 진다는 은유적 정식에서 표현한다. 내가 제3절에서 논했듯이, 칸트는 인간이 행복해질 가망에 대하여 특히 염세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칸트의 행복 개념의 순수 쾌락주의적 관점에서 그는 모든 행복의 합계는 음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삶의 특정 계획들을 실현함으로써 인간 자유를 실현하는 형태의 행복 역시 달성할 가망이 낮다. 행복은 오직 일어날 법하지 않은 우연 덕분에 발생한다. 왜냐하면 인간 계획의 실현은 우리의 통제 바깥에 있는 여건들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그 폭넓은 의미에서 행복을 실현할 가망조차도 너무도 불확실하여, 몇 번에나 걸쳐, 그는 그 어떤 합리적인 인간도 자신의 삶을 반복하기를 바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부모가 자신들의 아이에게 엄격한 의무를 지며 아이는 자신을 세계에 오게 했다는 그 사실에만 기초해서는 부모에게 아무런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칸트의 주장이 이해가능한 것이 된다. 그는 부모가 아이들을 세상에 오게 하는 조건의 매우 직접적인 정식을 선택한다: 존재하는 것만으로는 행복이 아니다. 그렇기보다는, 존재는 매우 불행하기 위한필요조건이다. 이 조건으로 세계에 오는 것은 혜택이나 선물이라기보다는 부담이다. 그것은 적어도, 아이가 자신의 부모에게 감사해야만 하는 그런 조건이 아니다. 그래서 칸트는 부모와 아이의 의무 관계를 비대칭적인 것으로 본다. Vorlesungsnachschrift Naturrecht Feyerabend에서 그는 부모가 출산이라는 바로 그 행위로 인해 자신들의 아이에게 가할지도 모르는 잠재적 해악에 관해 이야기한다. 칸트의 고려사항들은 그래서 생식이 적어도 윤리적으로 문제적이라는 것을 시사한다. Benatar (2006: 128-31)를 따라, 나는 이 입장이 목적 그 자체로서의 인간이라는 칸트적 이념에서 또한 도출될 수 있다고 논하였다: 인간의 생식은 윤리적으로 의문스러운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을 그 사람 자신을 위해 존재하게 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칸트에게, 인간이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는다면 도덕적으로 옳을지 모른다는 생각은, 인간이 더 이상 생식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비록 칸트가, 누군가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구성하는 해악과 도구화라는 윤리적 문제를 다루기는 하지만, (72)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적론적 관점에서 인간 생식이 정당성이 있는 것으로 기꺼이 여기고자 한다. 그는 심지어 그것에 간접적인 도덕적 기능도 귀속시킨다: 생식은 인간 종의 보존과 도덕적 완성에 기여한다. 종국에는, 이 이념은 인간이 존재해야 한다는 가정을 함축한다. 나는 이것이 조리에 맞지 않는 입장이 꼭 되는 것은 아니라고 시사하였다. 그것은 그렇기 보다는 윤리적으로 동기부여된 입장일 수도 있다. 칸트는 아마도 인간이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면 더 나으리라는 이념이 이미 존재하는 인간을 실존적으로 불합리한(absurd) 상황에 처하게 할 것이라고 가정했을 것이다. 임신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발상은, 합리적 존재의 자기 이해에 부적절(impertinence)하다. 자신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 나았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가정할 수 있다면 또한 의문스러울 것이다. 윤리적 이유들로 생식을 논박하는 입장은 모순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출산하지 않도록 하는 압력 하에 둠으로써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으며, 광신자들이 소위 윤리적 이유들로 임신을 강제로 종결시키는 행동에 나설 수도 있다.(주석 23)

 

그런 반출생주의적 입장은 인간 생물학, 일상생활의 직관 그리고 중심적인 윤리적 규준에 반하는 방향으로 상당한 거리까지 논지를 끌고 나갈 수 있다. 그러나, 내가 논했듯이, 목적론적으로 근거지어진 메타윤리적 관점에서는, 칸트가 그런 입장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좋은 이유들이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려사항들은 이런 종류의 반출생주의 입장을 뒷받침할지도 모르는 논증들을 담고 있다. 부모의 자신의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들, 엄밀하게 말해 완전히 이행될 수 없는 의무에 대한 그의 정당화 논거들은, 종국에는, 생식이 윤리적으로 대단히 의문스럽다는 이념의 기반이다.(주석 24)

 

인용에 관한 언급:

칸트의 저작은 약칭으로 인용되었으며 권수와 페이지 수는 Immanuel Kants gesammelte Schriften, Ausgabe der Kniglich Preuischen Akademie der Wissenschaften (Berlin: Walter de Gruyter, 1902)의 것을 표기한 것이다. 번역을 활용할 수 있을 때에는 Cambridge Edition of the Works of Immanuel Kant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2)의 것을 썼고,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내가 직접 번역하였다.

약칭은 다음과 같다.

AP = Anthropology from a Pragmatic Point of View (trans. Robert W. Louden in Kant 2007);

CJ = Critique of the Power of Judgement (Kant 2000);

CPrR = Critique of Practical Reason (in Kant 1996);

DS = Dreams of a Spirit-Seer Elucidated by Dreams of Metaphysics (in Kant 1992);

HN = Handschriftlicher Nachlass; HN A = Handschriftlicher Nachlass Anthropologie;

HN BR = Handschriftlicher Nachlass Bemerkungen zur Rechtslehre;

HN M = Handschriftlicher Nachlass Moralphilosophie;

HN NM = Handschriftlicher Nachlass Metaphysik (in Kant 2005);

HN VN = Handschriftlicher Nachlass Vorarbeiten und Nachtrge;

I = Idea for a Universal History with a Cosmopolitan Aim (trans. AllenW. Wood in Kant 2007);

LF = Naturrecht Feyerabend;

LM = Moral Mrongovius I;

LMET K2 = Vorlesung Metaphysik K2;

LP M1 = Metaphysik L1/Plitz;

LV = Die Metaphysik der Sitten Vigilantius (in Kant 1997; missing sections are translated by myself);

MA = Mutmalicher Anfang der Menschengeschichte (trans. Allen W. Wood in Kant 2007));

MM = Metaphysik der Sitten (in Kant 1996);

NM = Versuch den Begriff der negativen Grssen in die Weltweisheit einzuführen (in Kant 1992);

SF = Streit der Fakultten (trans. Mary J. Gregor and Robert Anchor in Kant 2001);

T = On the Miscarriage of all Philosophical Trials in Theodicy (trans. Georg Di Giovanni in Kant

2001);

VS = Vorkritische Schriften (the letter, Gedanken bei dem frühzeitigen Ableben des Herrn Johann Friedrich von Funk, in Kant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