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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습자료/외국문헌소개

[요약번역] 오츠카 "사람을 소유하기"

by 시민교육 2024. 1. 10.

Otsuka_Owning Persons.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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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츠카는 슈타이너와 함께 좌파 자유지상주의자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학자 중 한 명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께 묶이는 명칭에도 불구하고 오츠카가 슈타이너와 선명하게 논지를 달리하는 부분에 대해서 논하고 있는 글입니다. 총 네 가지 논점을 이야기합니다.

 

논점1: 슈타이너는 부모가 모의 자궁벽에 착상한 수정란이 자라난 성인 자녀를 온전히 소유하지 않는다고 본다. 케인은 오롯이 자신의 부모의 노동의 산물이 아니다. 케인을 낳으려면 조부모에게서 이전된 생식세포계열 유전 정보의 형태의 자연자원에 자신들의 노동을 섞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로크적 단서를 만족할 경우 개인이 소유하는 토지에 심은 도토리에서 나온 다 자란 나무를 온전히 소유한다는 주장과 상충한다.

 

논점2: 슈타이너는 우리 각자가 스스로에 대한 온전한 소유권을 갖는다고 본다. 그러나 이는 각자가 또한 자연자원의 평등한 몫에 대하여 소유권리를 갖는다는 주장과 상충한다. 이 긴장은 우리의 정신적 능력과 육체적 능력에 대한 자연의 기여가 각자가 자기소유하는 신체를 누구나 평등한 권리주장을 보유하는 자연자원으로 만든다는 함의를 그의 견해가 갖기 때문에 발생한다. 모든 사람이 유전적으로 동일하고 지구의 동등한 가치 몫을 보유하지만, 예측이 불가능한데다가 지구 전체에 미쳐 피난처가 없는데 양자역학적 불확정성을 가진 방사능 폭발로 인하여 인구의 반은 운 나쁘게 눈이 머는 상황이 발생한다고 해보자. 슈타이너가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부터는, 멀쩡한 두 눈을 보유한 사람이 자연자원의 공정한 몫을 넘는 것을 보유하고 있다는 결론이 따라 나온다. 사람들의 신체와 정신 구성에서의 불평등이 자연 작용만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비개인적 자원의 이전을 통해 보상이 불가능하다는 가정을 계속 유지한다면, 사람들의 몫은 두 눈을 가진 사람은 모두 한 쪽 눈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하는 방식으로 각자 한 쪽 눈만 갖는 결과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방식의 (즉 그 외 다른 경우가 파레토 우월적이지 않은) 결과이다. 슈타이너가 이런 경우에 눈 이식을 거부한다면, 이는 그가 다른 곳에서 고수했던 명제를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임이 틀림없다. 그 명제란, 우리의 신체와 정신적 능력이그리고 우리의 신체와 정신능력의 편차가자연의 작용만의 결과인 한, 우리의 신체가 자연자원이라고 (그래서 우리 각자가 평등한 권리주장을 갖고 있는 자원이라고) 보는 명제이다.

 

논점3: 슈타이너는 자신의 좌파 자유지상주의가 운 평등주의와 수렴한다고 본다. 그러나 상속과 유증만을 금지하고,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증여를 금지하지 않는 슈타이너의 이론은 자원에 대한 소유권리의 불평등을 낳는다. 그리고 그것을 허용하는 정도만큼 슈타이너의 이론은 운 평등주의와 수렴하지 못한다.

이에 대해 오츠카는 살아 있는 사람들 사이의 증여도 금지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렇게 금지하더라도 이는 온전한 소유권 침해가 아니다. 농부가자신이 추수한 것 중 무엇도 다른 사람들에게 주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그 땅을 구매하여 정당하게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의 토지 구매 계약 조항을 집행하기 위해 곡식을 주는 것을 막는다 하더라도 그의 자기소유권에 대한 침해가 전혀 아닐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의 자기소유권은 그 세계와의 상호작용으로 생성된 소득을 비시장적으로 이전하는 일이 평등주의적 단서에 의해 제약되는 경우에도 침해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이 자원들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막는 것은, 그 자신의 자기소유권의 제한이라기보다는 원래 할 권리가 없는 것을 하는 것을 막는 수단에 불과하다.

논점4: 슈타이너의 이론은 각자가 온전한 소유권리를 갖는 대상은 각자의 선택으로 마음대로 하더라도 도덕 규칙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이미 온전한 소유권을 갖는 것에 대한 제한은 평등한 자유를 불평등한 자유로 바꾸어 놓는 것이므로 허용될 수 없다고 본다. 그렇다면 가장 핵심적인 소유권인 자기소유권의 행사는 무엇이든 정의의 관점에서는 허용되어야 할 것이고, 이에 대한 제한은 불허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자기소유권 제한을 정의하는 데 커다란 난점이 있다.

먼저 슈타이너 자신이 제안한 도덕 규칙의 성질에 따라 자기소유권 제한을 정의하여보자. 슈타이너(1997, 298)는 기버드의 다음과 같은 주장을 긍정하면서 인용한다: ‘도덕 규칙은 그 규칙에 복종하는 한 개인의 행위가 자기 행위의 이득을 주거나 교환하려고 선택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행위자 자신에게만 이득을 주거나 해악을 주도록 구성되어야 한다.’(Gibbard 1976, 84). 그러나 그런 도덕 규칙은, 자기소유권을 포함하는 자유지상주의적 재산권과 일치하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제3자에게 가는 경쟁적 해악은 그런 재산권 제한에 해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서예에 대한 내 기량을 시대에 뒤져 쓸모없는 것으로 만드는 인쇄기를 발명한다면, 당신은 내 재능을 내 동의 없이 가치 없게 만들고 내 생계를 박탈함으로써 나에게 해를 입힌 것이지만, 내 자기소유권을 제한한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자유지상주의자가 그 사람의 동의 없이 그 사람에게 해를 입히는 것을 권리 제한으로 정의하는 것 이외의 다른 방식으로, 자기소유권 제한이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 경계 가로지르기라는 노직의 관념이나 침입 또는 침범이라는 톰슨의 연관된 관념(Nozick 1974, 57-8; Thomson 1990, chap. 8)을 채택한다고 가정해보자. ‘오로지 경계 가로지르기만 제한이고 그리고 모든 경계 가로지르기가 제한이라는 제안은 다음과 같은 명백한 반례를 극복해야 한다.

 

(i-a) 당신은 귀책 없이 그리고 위협을 가하지 않으면서 (그렇지만 당신의 초대를 받지는 않고) 당신의 밀폐된 방에 있는 사람을 둘러싼 당신이 소유하는 공기를 얼리거나 제거하여, 그가 얼어죽거나 폭발하도록 만든다. 이 경우 명백히 경계 가로지르기가 없다.

이 사안은 경계 가로지르기의 면에서는 다음 사안과 같다. 당신이 정당하게 소유한 재산의 경계 내에서 불을 피우다가 불을 껐다. 그런데 그 불을 보고 몸을 따뜻하게 하려고 옹송그려 앉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사람은 당신 사유지 경계 바로 바깥에 있으며, 불이 없으면 죽을 것이다. 당신이 물을 뿌려 불을 끈 결과, 그 사람 주위의 공기가 차가워져 그는 얼어 죽었다.

(i-b) 당신은 어떤 사람의 들숨 간격 사이에 그 사람의 입과 코에 인접한 공기에 매우 유독한 연기를 뿌렸다. 그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죽었다. 그 사람을 둘러싼 산소 분자를 제거하고 그것을 이산화탄소 분자로 바꿈으로써 어떤 사람을 질식시키는 사안에 대해서도 비슷한 것이 이야기될 수 있다.

(i-c) 당신이 정당하게 소유하는 다리 표면의 낙하문을 열어, 어떤 사람이 낙하하여 다리 아래에 있는 소유되지 않은 톱니 같은 바위에 떨어져 죽는다. 다시금 이것은 그의 자기소유권에 대한 제한은 아니다. 경계 가로지르기를 포함하지 않기 때문이다.

(i-d) 경계 가로지르기 또는 침범의 상당한 위험을 부과하는 경우와 위협을 부과하는 경우. 이 자체만으로는 경계 가로지르기나 침범이 아니다.

 

오츠카의 논의를 논점1과 논점2는 권리들을 소유권리로 환원함으로써 논의를 진행해나가는 슈타이너의 이론의 약점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논점3경쟁적 해악이 권리 침해라는 점을 보여주지 않는 한 오츠카의 논의는 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슈타이너가 답변 글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츠카 식으로 권리를 처음부터 재정의할 수 있다면 권리의 제한은 임의로 가능해지는 형태가 되어 권리론의 기초가 형해화되는 문제가 발생합니다.

논점 4경쟁적 해악을 제외하는 식으로 해악을 정교하게 구성한다면 슈타이너에게 치명적인 난점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봅니다만 이에 대해서는 확신하지 못하겠습니다. 권리를 소유권리로 환원하는 것 때문에 이러한 반례들을 처리하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고 예상됩니다. 모든 권리가 슈타이너식의 소유권리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고 본다면, 즉 그에 대한 개개인의 선택에 의해 동시행사의 가능성이 있는 것만이 진정한 권리이고 그 이외의 것은 권리가 아니라고 보는 그의 이론적 입장을 제외하면 위와 같은 반례들은 쉽게 처리라 수 있습니다. 동시행사의 가능성이 없는 것(즉 꼭 동시공존하지 않는 것)도 권리라고 본다면, 다시 말해서 모든 권리를 재산권과 같은 형태로 환원하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는 결과의 심각성에 초점을 맞추어 각자에게 속하는 것을 상황별로 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AB가 같은 공원에 있을 때 그 공원의 공기는 A의 소유도 B의 소유도 아니지만, B 코 근처에 있는 공기가 정상적인 공기라는 것은 B에게 속하는 것이고, B에게 속하는 것을 A가 박탈함으로써 B의 죽음을 초래했다면, AB에게 속하는 것을 가로질러 B에게 침해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